무원
통일신라

통일신라 9~10세기(헌덕왕, 흥덕왕, 신무왕, 경문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헌덕왕(재위: 809~826)
• 신라는 급찬 숭정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 812국9-19-08
• 신라촌락(민정)문서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7-2-01 인구중시하여 소아의 수까지 파악했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7-2-01 내시령과 같은 관료에게 토지가 지급되었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7-2-01 • 촌락의 경제력을 파악할 때 유실수의 상황을 반영했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7-2-01 • 촌락을 통제하기 위해서 지방관으로 촌주가 파견되었다. / X ⇒ 촌락을 통제하기 위해서 [토착민]으로 촌주가 [임명]되었다. 민정문서(815년 설 유력)지9-17-2-01 • 인구⋅토지면적 등을 기록한 장적(帳籍, 촌락문서)이 작성 되었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7-10 • 토지는 논, 밭, 촌주위답, 내시령답 등 토지의 종류와 면적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인구, 가호, 노비의 수와 3년 동안의 사망, 이동 등 변동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의 수,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까지 기록하였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6-02 • 인구는 남녀 모두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6-02 • 인구, 가호, 노비 및 소와 말의 증감까지 매년 작성하였다. / X ⇒ 인구, 가호, 노비 및 소와 말의 증감까지 [3년 마다] 작성하였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4-02 • 토지에는 연수유전답, 촌주위답, 내시령답이 포함되어 있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4-02 • 사람은 남녀로 나누고, 연령을 기준으로 하여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4-02 • 호(戶)는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 민정문서(장적 815년 설 유력)지9-14-02
웅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 김헌창의 난(822.3.)지9-17-06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였다. / 김헌창의 난(822.3.)법9-17-06 웅천주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 김헌창의 난(822.3.)법9-17-16

흥덕왕(재위: 826~836)
• 통일신라 : 장보고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 청해진 설치(828) 국9-21-07 장보고의 건의에 따라 청해진이 설치되었다. / 청해진 설치(828) 국9-20-11 청해진이 설치되어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 청해진 설치(828) 국9-17-11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 무역을 전개하였다. / 청해진 설치(828) 지9-22-01 청해진 설치 / 청해진 설치(828) 지9-20-10 완도청해진이 설치되었다. / 청해진 설치(828 장보고) 법9-17-06
• 이 엔닌은 대사의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머물러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도 대사께서 발원하신 적산원(赤山院)에 머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경(感慶)한 마음을 달리 비교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 대사:장보고 지9-17-06 법화원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하였다. / 장보고 지9-17-06 • 당나라에 가서 서주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 장보고 지9-17-06 회역사, 견당매물사 등의 교역 사절을 파견하였다. / 장보고 지9-17-06

신무왕(재위: 839.4~7.)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무왕이 즉위하였다. / 839 법9-18-10

경문왕(재위: 861~875)
쌍봉사 철감선사탑 / 선종, 쌍봉사 철감선사탑(868 전남 화순) 지9-18-02 선종이 보급되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다. / 쌍봉사 철감선사탑(868 전남 화순) 지9-17-2-06 • / (다)쌍봉사 철감선사 승탑(경문왕 868 추정) 법9-19-13 • / 쌍봉사 철감선사탑(868 전남 화순) 법9-14-06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 874 최치원(6두품) 지9-17-05 최치원빈공과에 합격한 뒤에 황소를 격퇴하는 글을 써서 당에서 명문장가로 유명해졌다. / 빈공과 합격(874), 토황소격문(879 황소의 난, 최치원) 법9-18-06 • 『제왕연대력』, 『계원필경』 등을 저술하였다. / 최치원, 계원필경(886) 지9-14-2-20 • 빈공과 합격을 위해 당에서 공부하는 신라 유학생 / 통일신라 시대 법9-17-04

진성여왕(재위: 887~897)
• 『삼대목』 편찬 / 888 지9-20-10
• 나라 안의 여러 군현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비어 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원종과 애노의 난(889) 국9-20-11 • 곳곳에서 도적이 벌 떼같이 일어났다. 이에,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상주)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나마 벼슬의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 하였다. / 원종애노의 난(889) 지9-16-11 • (나)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나마(관직명)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진을 쳐다보고는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 원종애노의 난(889) 법9-18-10 원종과 애노의 난 등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 원종애노의 난(889) 법9-14-06
최치원시무책 10여 조를 건의하였다. / 시무책 10여조(894 최치원) 국9-20-11 • ㉡___은(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 ㉡최치원(6두품), 시무책 10여조(894 최치원) 국9-17-01 • 그는 황소의 난을 토벌해야 한다는 격문으로 당에서 뛰어난 문장 솜씨를 인정받았다.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서 진성여왕에게 시무상소(時務上疏)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결국 현실 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관직을 버린 채 해인사은둔하였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 그:최치원(857~908), 시무책 10여조(894 최치원) 지9-14-2-20 • 벼슬이 6관등의 아찬까지 올랐다. / 최치원(857~908) 6두품 지9-14-2-20 • 나는 13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어.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중 황소의 난이 일어났어. 그때 황소를 격퇴 하자는 글을 써서 꽤 유명해졌지. 이후 벼슬살이를 그만 두고 고국으로 돌아와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지. 이에 절망하고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였어. / 최치원(857~908) 토황소격문(879 황소의 난, 최치원) 시무책 10여조(894 최치원) 법9-17-04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 / 최치원(6두품) 지9-17-05 •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왕조에서도 벼슬하였다. / X ⇒ 최치원은 신라에서는 벼슬을 하였지만 고려왕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지9-17-05
• 중국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지세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 도선(827~898) 지9-15-11

효공왕(재위: 897~912)
• 견훤은 900년에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 X ⇒ 견훤은 900년에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지9-12-11 • 견훤은 후당(後唐), 오월(吳越)과도 통교하는 등 대중국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 지9-12-11
•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서민을 현혹시켜 끌어 모았다. / 궁예(901~918 재위) 지9-14-2-14 • 궁예는 901년에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901 지9-12-11 • 궁예가 개성을 수도로 삼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901 법9-18-10
왕건이 이끄는 군대가 후백제의 금성을 함락하였다. / 903 법9-21-19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 마진(904) 지9-12-11

경명왕(재위: 917~924)
태조가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고쳐 천수라 하였다. - 『고려사』 - / 고려 건국(918) 법9-21-19

경애왕(재위: 924~927)
발해멸망하였다. / 발해 멸망(926) 국9-20-11 발해멸망하였다. / 발해 멸망(926) 법9-14-09

경순왕(재위: 927~935)
• 고려군이 고창에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패퇴시켰다. / 930 법9-21-19
• 발해국 세자 대광현과 수만 명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 934 법9-21-19
• 신라의 경순왕은 스스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었다. / 신라 멸망(935) 법9-21-19

통일신라 일반
• 삼국 통일 후에도 신라에서는 시비법이 발달하지 못하여 같은 토지를 해마다 경작할 수 없었다. /지9-14-2-11
• 산둥 반도의 신라원에 도착한 신라 사신 / 통일신라 시대법9-17-04
•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성장하였다. / 신라 하대지9-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