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통일신라

통일신라 7세기(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무열왕(재위: 654~661) 중대 시작(무열계 진골)
6두품이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국왕의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 신라 중대국9-13-17
김춘추의 신라 왕위 계승을 지원하였다. / 김유신지9-22-01 •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신라왕으로 즉위하였다. / 김춘추(654)국9-20-14 진골 출신으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다. / 654지9-21-12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물리쳤다. / 황산벌 전투(660 김유신)국9-20-14 • 신라가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을 무찔렀다. / 황산벌 전투(660 김유신 vs 계백)지9-18-05
•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은 국왕이 중국식 혼인 제도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 김흠운(? ~ 655):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의 첫 남편, 신문왕의 장인국9-14-08

문무왕(재위: 661~681)
• 태자로서 참전하여 백제멸망시켰다. / 태자:문무왕, 백제 멸망(660)국9-18-14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 661지9-18-05
• ★(가)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사상을 제시하였다. / (가)원효 일심사상(661 원효)국9-22-05 / • ( ㉠ )은(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일심(一心) 사상을 바탕으로 여러 종파들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며,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 일심사상(661 원효)국9-15-09 • ㉠은 미륵 신앙을 전파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 X ⇒ 정토 신앙을 전파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원효, 미륵신앙: 법상종, 진표(8c)국9-15-09 • ㉠은 무애가라는 노래를 유포하며 일반 백성을 교화하였다. / ㉠원효국9-15-09 십문화쟁론 / 원효(617~686)국9-12-19 •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제시하였다. / (가)원효 일심사상(661 원효)지9-21-07 / 일심(一心) 사상을 주장하여 불교 교리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 일심사상(661 원효)지9-19-09 • 원효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 일심사상(661 원효)지9-12-10 •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여 종파 간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 원효(617~686)지9-16-08 • 『십문화쟁론』을 지어 종파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 원효(617~686)지9-15-11 • 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마련하였다. / 원효(617~686)법9-18-06 • 그는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라는 구절을 따다 이름을 무애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다가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 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 - 삼국유사 - / 원효(617~686)법9-17-07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다. / 원효(617~686)법9-17-07
해심밀경소 / 원측(613~696)국9-12-19
복신과 도침 등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비성의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 661국9-16-07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복신을 공격하였다. / 662국9-18-14 /
백강전투(663) / 백제 부흥군을 지원온 왜와 나당연합군의 전투(나당연합군 승)법9-14-05
• 임존성에서 저항하던 지수신의 투항을 받아주었다. / X ⇒ 임존성에서 저항하던 지수신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663)국9-18-14
•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았다. / 663지9-18-05
• 665년 문무왕과 회맹 / 문무왕과 부여융의 동맹(665)국9-16-07
• 문무왕 8년(668)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의 관등을 내리고 ㉠식읍 500호를 주었다. /지9-12-05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 식읍지9-12-05 •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로의 대가로 지급하였다. / 식읍지9-12-05 • 해당 지역의 조세와 역 징발권을 부여하였다. / 식읍, 녹읍법9-13-02
• ★(가)는 화엄일승법계도를 만들었다. / (가)의상(625~702), 화엄일승법계도(668) 국9-22-05 화엄일승법계도 / 화엄일승법계도(668), 의상(625~702)국9-12-19 • 화엄 사상을 연구하여 화엄일승법계도를 작성하였다. / 화엄일승법계도(668), 의상(625~702)지9-21-07 •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화엄사상을 정리하였다. / 화엄일승법계도(668), 의상(625~702)지9-15-11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다. / 화엄일승법계도(668), 의상(625~702)법9-17-07 • 통일 이후의 사회갈등을 통합으로 이끄는 화엄사상을 강조하였다. / 의상지9-19-09 • ( ㉡ )은(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사상을 정립하고,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 ㉡의상국9-15-09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선양하였다. / 의상(625~702) 부석사 창건(676.2.)지9-16-08 • ㉡은 관음 신앙과 함께 아미타 신앙을 화엄 교단의 주요 신앙으로 삼았다. / ㉡의상국9-15-09 •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 할 때 만류한 일화로 유명하다. / 의상국9-22-05 •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문무왕의 정치적 자문도 맡았다. 그는 모든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포용하는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해 유명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독특한 논리를 폈다. 즉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 그 : 의상국9-12-19 • ㉡은 국왕이 큰 공사를 일으켜 도성을 새로이 정비하려 할 때 백성을 위해 이를 만류하였다. / ㉡의상국9-15-09 문무왕이 도성을 새롭게 짓고자 하니, ㉠___ 이(가) 말하기를 “비록 궁벽한 시골[草野] 띳집[茅屋]에 있다고 해도 바른 도를 행하면 복된 일이 오래 갈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을지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곧 그 성을 쌓는 것을 그만두었다. / ㉠의상지9-13-15 • 성은 김씨이다. 29세에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났다. …(중략) … 처음 양주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이 초청하여 그를 관아에 머물게 하고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얼마 후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다. -『삼국유사』-/ 인물:의상(625~702)지9-15-11
• 당나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멸망시켰다. / 고구려 멸망(668)국9-18-14
• 주(州)에는 지방 감찰관으로 보이는 외사정이 배치되었다. / 외사정 배치(673)국9-15-11
• 신라가 안승고구려왕에 봉했다. / 674지9-18-05 • 고구려 부흥 운동지원하였다. / 왕족 안승 보덕국왕으로 임명(674)법9-20-24
• 신라가 매소성에서 당군격파하였다. / 675국9-20-08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에 하였다. / 675법9-22-14
• 이날 소정방이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와 마주쳤다. …(중략)… 소정방이 신라군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고자 하니, 그가 군사들 앞에 나아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이유로 우리를 죄주려 하는구나.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야겠다.”라고 말하였다. / 그 : 김유신, 기벌포 전투(676.11 김유신) 황산 전투(660)지9-22-01 • 신라가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격파하였다. / 676지9-18-05
• 과인은 운수가 어지럽고 전쟁을 하여야 하는 때를 만나서 ㉠ 서쪽을 정벌하고 ㉡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켰고, ㉢ 배반하는 무리를 토벌하고 ㉣ 협조하는 무리를 불러들여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안정시켰다. / ㉠-태자로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660) ㉡-당나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복신을 공격하였다.(662) ㉣-임존성에서 저항하던 지수신의 투항을 받아주었다. ⇒ ㉣-임존성에서 저항하던 지수신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문무왕국9-18-14
• (가) 대왕을 도와 조그마한 공을 이루어 삼한을 한 집으로 만들었으며, 백성들은 두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비록 아직 태평한 세상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편안한 상태는 되었습니다. / 삼국통일(문무왕, 676)법9-18-10 •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 / 삼국통일(문무왕 676)법9-16-04

신문왕(재위: 681~692)
• ㉠___은(는)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통하여 조언하였다. / ㉠설총(6두품)국9-17-01
• 왕 원년: 소판 김흠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 김흠돌의 난(681)국9-18-12 • 내가 위로는 천지 신령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종묘 영령의 보살핌을 받아, 흠돌 등의 악행이 쌓이고 가득 차자 그 음모가 탄로나게 되었다. …… 이제는 이미 요망한 무리들을 숙청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염려할 것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를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 삼국사기 - / 김흠돌의 난(681)법9-17-06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 김흠돌의 반난(681)법9-16-04 • 원년 8월 - 김흠돌, 흥원, 진공 등이 반역을 모의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 김흠돌의 반난(681)법9-12-20
•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 681법9-14-06
• 2년 4월 - 위화부령 두 명을 두어 선거 사무를 맡게 했다. / 682법9-12-20
국학을 설치하였다. /국학 설치(682)국9-20-11 국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교육하였다. /국학 설치(682)국9-18-12 •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국학 설치(682)국9-13-11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을 교육하였다. /국학 설치(682)지9-21-12 국학 설치 /국학 설치(682)지9-20-01
•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려 했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이 왕이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유언에 따라 유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 이 왕:신문왕, 감은사 완성(682)지9-21-12
9주 5소경 설치 / 9주 5소경(685)국9-19-14 9주 5소경 / 9주 5소경(685)지9-17-2-09 • 지방 행정 조직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 9주 5소경(685)지9-17-07 •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 9주 5소경(685)지9-16-02 • 신문왕 대에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 9주 5소경(685)국9-15-11 5소경을 전략적 요충지에 두고, 도독이 행정을 관할토록 하였다. / X ⇒ [9주]을 전략적 요충지에 두고, 도독이 행정을 관할토록 하였다. / 9주 5소경(685)국9-15-11 9주 5소경을 정비하였다. /법9-16-07 • 5년 봄 -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거열주를 승격시켜 청주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가 갖추어졌다. 서원과 남원에 각각 소경을 설치하였다. / 9주 5소경(685)법9-12-20
•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 9서당(693) 10정(687 지방군)지9-22-03 10정 / 10정(687 지방군)지9-17-03
• 관료에게는 관료전을, 백성에게는 정전을 지급하였다. / 관료전 지급(687), 정전 지급(722 성덕왕)지9-16-02 • 신문왕 7년(687)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 있게 주었다. / 관료전 지급(687)지9-12-05 • 신문왕 때 관료전이 지급되었다. / 관료전 지급(687)법9-20-10 •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 관료전 지급(687)법9-12-20
녹읍 제도: 신라의 관료에 지급한 토지제도 /지9-18-07 •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신문왕 9년(689)에 이것을 폐지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이 주어졌고, 한편 일정한 양의 곡식이 세조(歲租)로서 또한 주어졌다. 그러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다시 이것이 부활되는 변화과정을 겪었다. / 이것 : 녹읍, 녹읍 폐지(689)국9-14-07 / •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주민을 노역(勞役)에 동원할 수 있었다. / 녹읍국9-14-07/ • 이것이 폐지되자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라는 사상이 새롭게 나오게 되었다. / X ⇒ 이것이 폐지되자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라는 사상이 새롭게 나오게 된 것은 [아니다]. 이것: 녹읍국9-14-07 • 삼국통일 이후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육두품 신분의 사람들에게 특별히 지급하였다. / X ⇒ 녹읍은 삼국통일 이전에도 지급하였다. 녹읍국9-14-07 • 녹읍은 촌락에 거주하는 양인농민인 백정이 공동으로 경작하였다. / X ⇒ 백정: 고려 때에 토지를 직접 경작하던 일반 농민국9-14-07 • 관리의 녹읍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 녹읍 폐지(689)국9-13-17 관료전지급하고 녹읍폐지하였다. / 관료전 지급(687), 녹읍 폐지(689)지9-22-02 녹읍 폐지 / 녹읍 폐지(689)지9-20-10 • 신문왕 9년(689) 내외 관료의 ㉢녹읍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주었다. /지9-12-05 • 신문왕 때 녹읍폐지되었다. / 녹읍 폐지(689)법9-20-10 녹읍폐지되었다. / 녹읍 폐지(689)법9-17-06 / 녹읍폐지되고 관료전지급되었다. / 녹읍 폐지(689), 관료전 지급(687)법9-14-06
• 왕 9년: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다 실현하지 못하였다. / 689국9-18-12 / •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자자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 삼국유사 - / 왕: 신문왕, 만파식적 설화법9-16-04 /

효소왕(재위: 692~702)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 9서당(693) 10정(687 지방군)지9-22-03 중앙의 핵심 군단으로 9서당이 있었다. / 9서당(693)지9-17-2-09 9서당 / 9서당(693) 중앙군지9-17-03
• 수도에 서시남시를 설치하였다. / 695국9-18-12 • 왕경에 서시전남시전이 설치되었다. / 695지9-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