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신라

신라 7세기(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평왕(재위: 579~632)
• 왕에게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 원광 걸사표(608)지9-21-07
• 화랑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를 제시하였다. / 세속오계(원광법사)국9-20-14 • (가)___ 가/이 귀산 등에게 말하기를 “세속에도 5계가 있으니,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것, 셋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것,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 (가)원광(542~640) 세속오계지9-21-07 • 화랑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를 지었다. / 원광(542~640)지9-19-09 세속 5계를 만들어 젊은이에게 규범을 제시하였다. / 원광(542~640)지9-13-15

선덕여왕(재위: 632~647)
•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선덕여왕 634)지9-17-2-06
대야성의 패전에서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 왕에게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해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허락했다. - 삼국사기 - / 대야성의 패전(642) 신: 김춘추법9-20-24
• ★진골 귀족 출신으로 대국통을 역임하였으며,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 자장 대국통(643)국9-22-05 대국통으로 있으면서 계율을 지키는 일에 힘을 보탰다. / 자장 대국통 임명(643)지9-19-09 • 그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국왕에게 황룡사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그가 9층탑 건립을 건의한 데에는 주변 나라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호국정신이 담겨 있다. / 그:자장, 황룡사 9층탑(645)지9-19-09 •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룡은 나의 아들로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탑을 세우시오. 그렇게 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 백제에서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을 초빙하여 이 탑을 건축하고 용춘이 이를 감독했다. - 『삼국유사』- / 탑 : 황룡사 9층탑(645)지9-17-2-06 자장 율사가 건의하여 세워졌다. / 황룡사 9층탑(645)지9-17-2-06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 자장, 황룡사 9층탑(645)지9-13-15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 황룡사 9층탑(645)법9-20-24
첨성대 건립 / 첨성대(632~647)지9-20-01 • 선덕여왕 때에 첨성대를 세웠다. / 첨성대(632~647)지9-19-05

진덕여왕(재위: 647~654)
당나라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 648 김춘추지9-21-06 김춘추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요청해 얻고 돌아와서 (가)___을/를 보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렸는데, 살아 돌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가)___ 이/가 대답하기를, “저는 나라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두 차례 백제와 크게 싸워 20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품석 부부의 유골이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니 천행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가)김유신 나당동맹(648)국9-20-14 • 진덕여왕 2년, 김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는데, 종자인 온군해가 대신 피살되었고 그는 무사히 신라로 귀국했다. / 649 김춘추:진골지9-17-2-10
• 당에서 숙위 활동을 하다가 부대총관이 되어 신라로 돌아왔다. / 653 김인문:무열왕의 아들국9-20-14
성골 출신의 국왕이 재위하였다. / 성골: 신라 상대, 진덕여왕마지막 성골지9-2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