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조선 19세기 - 고종(흥선대원군 집권기, 1863~1873)

조선 19세기고종(흥선대원군 집권기, 1863~1873)


26대 고종 (재위: 1863~1896_34년) / 12세 즉위 / 흥선대원군 집권기(1863~1873)
고종즉위(1863) /법9-19-01 •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러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았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을 폈다. / 흥선대원군 집권(1863.12.23.~1873.11.)법9-16-14
• ★고종이 즉위한 직후에 실권을 장악한 그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 교섭하려 했다. 하지만 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생의 주장이 높아지자 다수의 천주교도와 선교사를 잡아들여 처형한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이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됨에 따라 물러난 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잠시 권력을 장악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곧 물러났다. / 그: 흥선대원군, 병인박해(1866), 고종의 친정(1873)국9-22-14 의정부삼군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 흥선대원군 집권기(1863~1873) 국9-13-16 • 철종이 죽고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이 되자, 고종의 아버지인 (가)___ 가/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가)___ 는/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때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징수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당백전이라는 화폐도 발행되었다. / (가)흥선대원군(1863~1873)지9-21-14
• ★『대전회통』을 편찬 / 1865국9-22-07 • 『대전회통』이 편찬되었다. / 1865지9-21-13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리하였다. / 1865지9-12-17
만동묘 건립을 주도하였다. / X ⇒ 만동묘를 철페하였다. 1865국9-21-20 / 서원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 서원 정리(1864~1871)지9-21-14 • 8도의 선비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명현을 제사하고 …… 그 폐단이 백성의 생활에 미쳤다. (가)___ 은/는 만동묘철폐하고 폐단이 큰 서원을 각 도에 명하여 철폐하도록 하였다. 선비들 수만 명이 대궐 앞에 모여 만동묘와 서원을 다시 설립할 것을 청하니, (가)___ 이/가 크게 노하여 한성부의 조례와 병졸로 하여금 한강 밖으로 몰아내게 하고 ……드디어 1천여 개소의 서원을 철폐하고 그 토지를 몰수하여 관에 속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선비들의 기운이 크게 막혔다. / 만동묘 철폐(1865), 서원 정리(1864~1871)법9-21-17 서원 숫자의 변화를 조사해본다. / 서원 정리(1864~1871)법9-20-02 만동묘 철폐를 비롯한 서원 정리 추진 / 만동묘 철폐(1865)법9-15-12
삼군부가 부활되고 삼수병이 강화되었다. / 삼군부 부활(1865)지9-19-18
• 이때 거두어들인 돈을 ‘스스로 내는 돈’이라는 뜻에서 원납전이라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입을 삐쭉거리면서 ‘원납전 즉 원망하며 바친 돈이다.’ 라고 하였다. - 『매천야록』에서 -/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1865~1868.7.2.)지9-19-18 당백전으로 물건을 사는 농민 / 당백전(1866~1867 흥선대원군) : 경복궁 중건 비용지9-14-08 • 19세기 전반, 군사비 지출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 X ⇒ 19세기 전반,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 당백전(1866~1867 흥선대원군)지9-13-10
비변사 폐지 / 1865법9-22-10 •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폐지되었다. / 비변사 1865법9-16-10
• 환곡제를 면민이 공동출자하여 운영하는 사창제로 전환하였다. / 1866지9-16-09
• ★병인박해 / 1866 봄국9-22-14 /
•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격침되었다. / 1866.8.21.국9-14-16 • 평양의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 / 1866.8.21.지9-21-16 제너럴셔먼호 사건 / 1866.8.21.지9-17-2-1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영향을 파악한다. / 1866.8.21.법9-17-20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게 약탈당하였다. / 병인양요(1866.9.18. ~ 11.21.) 조선왕조의궤 약탈당함국9-13-13 • 1975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는 이곳 도서관에서 조선시대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를 알렸다. 그 후 1990년대 초 한국 정부가 반환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11년에 ‘5년마다 갱신이 가능한 대여 방식’으로 반환되었다. / 이곳: 프랑스, 도서 : 조선왕조의궤지9-15-15 • 이 사건 당시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 이 사건: 병인양요(1866.9.18. ~ 11.21. 병인박해를 이유로 프랑스 군이 침공)지9-17-2-11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약탈하였다. / 병인양요(1866.9.18.~11.21.)지9-15-15 • 왕실의 행사에 사용된 도구, 복식 등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 조선왕조의궤지9-14-14 이두와 차자(借字) 및 우리의 고유한 한자어(漢字語)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 조선왕조의궤지9-14-14 • 왕실 혼례장례,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하였다. / 조선왕조의궤지9-14-14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신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어람용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 X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어람용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 병인양요(1866.9.18.~11.21.)지9-14-14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주요 시설을 불태우고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였다. / 병인양요(1866)법9-22-18 병인양요 1866 /법9-21-15 • (가)는 자국인 신부의 처형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 (가)프랑스, 병인양요(1866.10.15.~11.18.) 병인박해(1866, 프랑스 신부)법9-20-06
• / 외규장각 의궤 : 병인양요(1866) 프랑스 약탈법9-17-20 병인양요의 전개 과정을 조사한다. / 병인양요(1866)법9-17-20
• 최익현 -일본의 세력 확대에 맞서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다. / X ⇒ 이항로 -[서양]의 [무력침략]에 맞서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다.(1866) 이항로(1792~1868)법9-15-22
•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 1868.5.11.~5.18.국9-22-20 오페르트남연군의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 1868.5.11.~5.18.지9-21-16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 사건 / 1868.5.11.~5.18.지9-17-2-11 •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덕산군에 상륙하여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 1868.5.11.~5.18.법9-22-18 •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5.)법9-18-04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결과를 분석한다. /법9-17-20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중건되었다. / 1865~1868.7.2.지9-22-11
• 군역에 뽑힌 장정에게 군포를 거두었는데, 그 폐단이 많아서 백성들이 뼈를 깎는 원한을 가졌다. 그런데 사족들은 한평생 한가하게 놀며 신역(身役)이 없었다. …(중략)… 그러나 유속(流俗)에 끌려 이행되지 못하였으나 갑자년 초에 그가 강력히 나서서 귀천이 동일하게 장정 한 사람마다 세납전(歲納錢) 2민(緡)을 바치게 하니, 이를 동포전(洞布錢)이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그: 흥선대원군 호포제(1871.3.25.)국9-21-20 군포에 대한 양반들의 면세특권이 폐지되었다. / 호포제(1871.3.25.)국9-20-07 / 은결을 색출하고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 호포제(1871.3.25.)법9-21-17 / • 나라 제도로서 인정(人丁)에 대한 세를 신포(身布)라 하였는데 충신과 공신의 자손에게는 모두 신포가 면제되어 있었다. 이 법이 시행된 지도 이미 오래됨에 턱없이 면제된 자가 많았다. 그 모자라는 액수는 반드시 평민에게 덧붙여 징수하여 보충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를 수정하고자 동포(洞布)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 호포제(1871.3.25.)법9-19-08 • 군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호포제가 실시되었다. / 호포제(1871.3.25.)법9-16-14 과세 대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 호포제(1871.3.25.)법9-13-11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1870):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나타냄 국9-17-10
• ★신미양요 / 신미양요(1871.6.1.~6.11.)국9-22-20 / • ★전국 여러 곳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했다. / 흥선대원군 신미양요(1871.6.1.~6.11.) 이후 국9-22-14 • 그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면서 성벽에 올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창칼로 상대하는데 창칼이 없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적군 눈에 뿌렸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드는 적군에게 죽기로 싸우다 마침내 총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 신미양요(1876.6.1.)국9-20-07 미군광성보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 신미양요(1871.6.1.~6.11.)지9-21-16 미군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광성보를 침공하였다.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은 격렬히 항전했지만, 미군에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미군은 물러갔다. / 신미양요(1871.6.1.~6.11.)지9-17-2-11 • 전국 여러 곳에 척화비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 신미양요(1871.6.1.~6.11.)지9-17-2-11 어재연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하였다. / 신미양요(1871.6.1.~11.)지9-15-15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일어났다. / 신미양요(1871.6.1.~11.) 재너럴 셔먼호 사건(1866.8.21.)지9-15-15 미군이 강화도의 초지진을 함락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 신미양요(1871.6.1.~11.)법9-22-18 신미양요 1871 /법9-21-15 어재연이 이끄는 부대가 전력의 열세로 결국 함락 당하였다. / 신미양요(1871.6.1.~11.)법9-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