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7세기 - 인조
조선
조선 17세기(인조)
16대 인조 1623~1648_27년 / 28세 즉위
•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 인조반정(1623.3.13.) 서인이 북인을 몰락시킴지9-16-20
• 화이론적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 서인지9-13-17
• (가)___ 은/는 반정을 주도하여 정권을 잡은 이후 훈련도감을 비롯하여 새로 설치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의 병권을 장악하여 권력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다. / (가)서인, 인조반정(1623.3.13.)법9-22-17
• 서인이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법9-21-04
• 사림의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켜 반정과 환국을 초래하였다. / 인조반정(1623) 경신환국(1680 숙종) 기사환국(1689 숙종) 갑술환국(1694 숙종)법9-15-10
•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 온 것이 2백여 년이다.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입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 서인: 친명배금법9-15-12
•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 추진 / 서인: 북벌론법9-15-12
• 광해군의 정책에 반발하여 반정이 일어났다. / 인조반정(1623.3.13.)법9-15-15
•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이 광해군을 무력으로 몰아 내고 능양군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광해군과 대북파는 명을 배신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쫓겨났다. / 인조반정(1623)법9-14-16
• ㉠은 광해군 때, ㉡은 인조 때 정권을 장악하였다. / ㉠북인, ㉡서인법9-12-12 /
• 호위청, 총융청, 수어청 등의 부대를 창설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 호위청(1623), 총융청(1623), 수어청(1626)지9-18-11
• 어영청 / 어영청 설치(1623)지9-15-08
• 이괄의 난 / 이괄의 난(1624)지9-19-10
•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 이괄의 난(1624)법9-12-25
•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보은 법주사 팔상전, 논산 쌍계사 등 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불교 건축물이다. / 금산사 미륵전(1635), 법주사 팔상전(1624 사명대사), 논산 쌍계사(1738 영조) 조선 후기법9-19-04 /
• 정주 목사 김진이 아뢰기를, “금나라 군대가 이미 선천·정주의 중간에 육박하였으니 장차 얼마 후에 안주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묻기를, “이들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듣건대 홍태시란 자가 매번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 정묘호란(1627)법9-15-15
• 영정법이 제정되어 복잡한 전세 방식이 일원화되었다. / 영정법(1635)국9-20-07
• 토지 등급을 대부분 하등으로 정하여 전세를 경감해 주었다. / 영정법(1635)지9-17-2-02
• 풍흉에 상관없이 1결당 4∼6두를 조세로 징수하였다. / 영정법(1635)지9-17-12
•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쌀 4∼6두씩을 내게 하였다. / 영정법(1635)법9-18-09
• 농민 부담을 낮추기 위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하였다. / 영정법(1635)지9-16-04
•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다. / 영정법(1635)지9-14-2-03 /
• 전세가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정해졌다. / 영정법(1635)지9-13-19
• 영정법을 도입하였다. / 영정법(1635)법9-22-08
• 영조 대에 토지 1결당 쌀 4두를 징수하였다. / X ⇒ [인조] 대에 토지 1결당 쌀 4두를 징수하였다. 영정법(1635)법9-19-20
• 마침내 연분9등법을 파하였다. 삼남지방은 각 등급으로 결수를 정해 조안에 기록하였다. 영남은 상지하(上之下)까지만 있게 하고, 호남과 호서지방은 중지중(中之中)까지만 있게 하였다. / 영정법(1635), 만기요람법9-16-09
•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시켰다. /법9-12-07
•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했던 산성이다. / 병자호란(1636)국9-21-08
• 병자호란 / 병자호란(1636)지9-19-10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농민의 조세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양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 극복방안 : 양전 사업 실시, 병자호란(1636) 국9-12-15
• 황폐해진 농지를 개간하도록 권장하고 전국적인 양전 사업을 시행하였다. /지9-17-13
•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해졌다. / X ⇒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하지 않았다. 조선 중화주의 사상이 나타났다.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지9-12-16
• 외적의 침입으로 국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다. / 병자호란(1636.12.28.~1637.2.24.)법9-16-08
• 청에 대한 외교 노선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 김상헌(주전파)과 최명길(주화파) 병자호란(1636.12.28.~1637.2.24.)법9-15-07
• 청으로부터 군신 관계의 체결을 요구받았다. / 병자호란(1636.12.28.~1637.2.24.)법9-14-16
• 김제 금산사 미륵전은 다층 건물이나 내부가 하나로 통한다. / 금산사 미륵전(1635)국9-19-15
•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보은 법주사 팔상전, 논산 쌍계사 등 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불교 건축물이다. / 금산사 미륵전(1635), 법주사 팔상전(1624 사명대사), 논산 쌍계사(1738 영조)법9-1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