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조선 16세기(선조)

조선 16세기(선조)


14대 선조 1567~1607_41년 / 16세 즉위
• 『어우야담』을 비롯한 야담⋅잡기류가 성행하였다. / 어우야담(유몽인, 최초의 야담집) 유몽인(1559~1623)국9-20-03
•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경연에서 강의하였다. / 성학십도(1568 이황)국9-21-02 • 이제 이 도(圖)와 해설을 만들어 겨우 열 폭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 풀어 놓았습니다만, 이것을 생각하고 익혀서 평소에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공부하소서. 도(道)가 이룩되고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사오니, 오직 전하께서는 이에 유의하시어 여러 번 반복하여 공부하소서. / 성학십도(1568 이황)지9-14-09 •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여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성학십도』가 있다. / 성학십도(1568 이황)지9-13-14 • 그의 사상은 사림이 구체제를 비판하고 훈척과 투쟁하던 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왕 스스로가 인격과 학식을 수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상이 일본에 전파되면서 일본에서는 그를 ‘동방의 주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그: 이황법9-20-23 성학십도를 저술하였다. / 성학십도(1568 이황)법9-20-23 • 후세 임금들은 천명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무겁고 지극히 크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는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 바라옵건데 밝으신 임금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깊이 살피시어, 먼저 뜻을 세워 “노력하면 나도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성학십도- / 성학십도(1568 이황)법9-15-10
• 1566년(31세) ㉠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다. / 이이, 사간원(왕의 정책을 간쟁) 1569국9-19-18 • 1568년(33세) ㉡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외할머니 이씨의 병환 소식을 듣고 사퇴하다. / 이이 이조좌랑(삼사의 관리를 추천하는 권한이 있었다.) 1569국9-19-18 • 1569년(34세) 동호독서당에 머물면서 『동호문답』을 찬진하다. / 이이 1569국9-19-18 • 1574년(39세) ㉢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어 『만언봉사』를 올리다. / 이이 승정원(왕명을 출납하면서 왕의 비서기관의 업무를 하였다.) 1574국9-19-18 • 1575년(40세) ㉣ 홍문관 부제학에서 사퇴하고 『성학집요』를 편찬하다. / 이이, 홍문관(학술 연구, 왕의 자문 대비, 경연 1575국9-19-18 • 올해 초가을에 비로소 저는 책을 완성하여 그 이름을 『성학집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임금이 공부해야 할 내용과 방법, 정치하는 방법, 덕을 쌓아 실천하는 방법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방법이 실려 있습니다. 또한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알게 하고 이것을 미루어 저것을 밝혔으니, 천하의 이치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저의 글이 아니라 성현의 글이옵니다. / 저 : 이이 1575지9-22-17 • 『동호문답』을 저술하였다. / 1569 이이지9-22-17 • 방납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하였다. / 이이(1536~1584)지9-14-09 / •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 이이(1536~1584)지9-13-14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 성학집요(1575 이이)법9-20-23 • 제왕의 학문은 기질을 바꾸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치는 정성을 다해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질을 바꾸는 데는 병을 살펴 약을 쓰는 것이 효과를 거두고, 어진 이를 쓰는 데는 상하가 틈이 없는 것이 성과를 얻습니다. -성학집요- / 성학집요(1575 이이)법9-15-10
• 이기론의 탐구보다는 의리와 명분의 실천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 X ⇒ 의리와 명분의 실천보다 [이기론의 탐구]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황과 이이(16세기)법9-15-10 사림의 성장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통치이념이 강화되었다. / 16세기법9-15-10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 기호학파(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주기적 경향의 성리학자)법9-20-23
노장 사상을 포용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 조식(1501~1572)지9-14-09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되었다. / 동인과 서인의 붕당(1575)지9-20-07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자 전랑으로 천거하려고 하였다. 김효원이 “외척은 쓸 수 없다.” 하며 막으니, 심의겸이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으냐.” 하였다. 이때 김효원 편을 드는 사람들은 “효원의 말은 공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의겸이 사사로운 혐의로 좋은 선비를 배척 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 동인과 서인의 붕당(1575)지9-15-07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화 / 동인과 서인의 붕당(1575)지9-15-07 김효원이 알성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장원 급제하여 전랑으로 천거되었으나, 외척이라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 때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상대방을 배척하여 붕당이 형성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__ 이 형성되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__ 이 형성되었다. / ㉠서인, ㉡동인, 동인과 서인의 붕당(1575)법9-12-12 • ㉠은 이황⋅조식⋅서경덕의 문인이 가담하였다. / ㉠동인법9-12-12 • ㉡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분열하였다. / ㉡동인, 정여립 모반사건(1589),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법9-12-12
해주향약을 보급하였다. / 해주향약(1577) 이이국9-21-02 • (가)는 도학의 입문서인 『격몽요결』을 저술하였다. / (가)이이, 격몽요결(1577, 이이)지9-13-14 •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기를 중시하여 경장(更張)을 주장하였다. / 이이국9-18-16 • 아홉 차례의 과거 시험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 이이국9-16-14 • 우주자연은 (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는 영원불멸하면서 생명을 낳는다고 보았다. / 이이(1536~1584)국9-16-14 • 이황은 16세기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 X ⇒ [이이]는 16세기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국9-14-18
• 서인 정치에 한계를 느낀 정여립모반을 일으켰다. /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0.)지9-20-19 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는 역성혁명을 꿈꾸었다. /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0.)지9-14-17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화 /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0.) 동인 희생지9-15-07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 기축옥사(1589)법9-22-24 동인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하였다. /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0.)법9-21-04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사림 세력이 갈라졌다. /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0.)법9-19-06 /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0.)법9-19-23
임진왜란 / 임진왜란(1592.5.23.~1598.12.16.)국9-16-09 • 경성에는 종묘, 사직, 궁궐과 나머지 관청들이 또한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사대부의 집과 민가들도 종루 이북은 모두 불탔고 이남만 다소 남은 것이 있으며, 백골이 수북이 쌓여서 비록 치우고자 해도 다 치울 수 없다. 경성의 수많은 백성들이 도륙을 당했고 남은 이들도 겨우 목숨만 붙어 있다.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고 진제장(賑濟場)에 나아가 얻어먹는 자가 수천 명이며 매일 죽는 자가 60 ∼70명 이상이다. - 성혼, 『우계집』에서 - / 우계집(1621 간행) 사료:임진왜란(1592)지9-19-10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 임진왜란(1592) 4대 사고 중 소실(서울, 성주, 충주) 전주 소실 안됨지9-14-2-07 • 건주(建州)의 여진족이 왜적을 무찌르는데 2만 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하자, 명군 장수 형군문이 허락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 사신 양포정은 만약 이를 허락한다면 명과 조선의 병력, 조선의 산천 형세를 여진족이 알게 될 수 있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 전쟁: 임진왜란(1592~1598)법9-22-13 •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 임진왜란(1592~1598)의 영향법9-22-13
•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이튿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 임진왜란(1592~1598)법9-15-15 • 첨사 정발은 부산포에서, 도순변사 신립은 상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 X ⇒ 첨사 정발은 부산포에서,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 정발(1592.5.23.) 신립(1592.6.7.) 지9-17-14
• (가) -임진왜란 때 선조피난하였다. / (가)의주, 의주 파천(1592.6.)법9-16-22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의 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 한산도 대첩(1592.7.)국9-16-09 /
•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의 대군을 맞아 격전 끝에 진주성을 지켜냈다. / 1차 진주대첩(1592.10.)국9-16-09
공명첩을 구입한 사람들의 신분을 조사해본다. / 공명첩(1592)법9-20-02 납속의 혜택에 대하여 조사해본다. / 납속책(1593)법9-20-02
• 조선: 명과의 교류에서 중강개시와 책문후시가 전개되었다. / X ⇒ []과의 교류에서 중강개시와 책문후시가 전개되었다. / 중강개시(1593)국9-21-07 /
•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합세하여 평양성탈환하였다. / 평양성 탈환(1593.1.)국9-16-09 • 조선군은 명나라 지원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게 뺏긴 평양성탈환하였다. / 평양성 탈환(1593.1.)지9-17-14 •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 평양성 전투(1593.1.)법9-16-08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 행주대첩(1593.2.)국9-16-09 권율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격파하였다. / 행주대첩(1593.2.)지9-18-15 /
• 조⋅명 연합군과 이순신의 활약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명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명과 왜군의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 휴전 제의(1593.8.)법9-14-16
•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대의 편제를 바꾸었다. / 훈련도감 설치(1593.8.)지9-17-14 • 국왕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 이때에 임금께서 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고 명하시고 나를 그 책임자로 삼으시므로, ……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 쏘는 법과 창, 칼 쓰는 기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 당번을 정하여 궁중을 숙직하게 하고, 국왕의 행차가 있을 때 이들로써 호위하게 하니 민심이 점차 안정되었다. - 서애집 - / 훈련도감 설치(1593.8.) 서애집(유성용 1633)법9-18-11 포수, 사수, 살수로 조직되었다. / 훈련도감(1593.8.)법9-18-11 • 제승방략 체제에 맞는 군사 조직이었다. / X ⇒ 훈련도감은 제승방략 체제와는 관련 없다. 제승방략체제(1510 중종) 삼포왜란(1510) 이후법9-18-11
• 의주로 피난했던 국왕 일행이 한성으로 돌아왔다. / 1593.10.지9-18-15 /
속오군 / 속오군(1594 지방 군사제도)지9-17-03 / • 신분 구분 없이 노비에서 양반까지 편성되었다. / 속오군(1594 지방 군사제도)법9-18-11
•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 정유재란(1597.8.27.~1598.12.16.)법9-16-08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 칠천량 해전(1597.8.27.)지9-18-15
이순신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 명량해전(1597.10.25.)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 상유십이)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지9-18-15 • ○○○이(가) 진도에 도착해 보니 남아 있는 배가 10여 척에 불과하였다. …… 적장 마다시가 2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서해로 가려다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12척의 배에 대포를 실은 ○○○은(는)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물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에 나서자 그 많은 적도 당하질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 징비록 - / 명량해전(1597.10.25.)법9-16-08
• 전세가 불리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란이 끝났다. / 1598지9-17-14
비변사 당상들이 중요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1592~1598)지9-19-18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지도가 전해짐으로써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리학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 곤여만국전도(1602)국9-12-18 • 서양 문물의 수용, 곤여만국전도 / 곤여만국전도(1602)법9-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