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일제강점기 1924~1927

일제강점기 (1910.8.22. ~ 1945.8.15.)


일제강점기 1924~1927
• 일부 구성원을 황푸군관학교에 보내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 일부 구성원: 의열단원, 황푸군관학교(1924.1.~1931.10.)지9-18-13 • (가)___는 황포 군관 학교에서 훈련받았고, (나)___는 민족주의 역사 서술의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 / (가)김원봉(1926) 황포군관학교(1924.1. 설립 광저우) (나)신채호 지9-22-20
• 그러면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에게는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민족적 경륜(이광수, 1924, 동아일보) : 민족적 타협주의국9-12-09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그 밑에서 정치적 실력 양성을 해야 한다. / 민족적 경륜(자치론)국9-12-09 •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이광수, 동아일보 - / 민족적 경륜(1924.1.2~1.6. 이광수, 동아일보 사설)법9-18-08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 민족적경륜(1924.1.2.~1.6. 이광수) 법9-17-23
• 일본 제국의회와 황궁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 황궁 공격(1924.1.5.) 김지섭 의열단국9-16-15
조선노농총동맹 / 1924.4.18.지9-18-04 농민, 노동자를 단결시켜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 / 노동, 농민운동론국9-12-09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 1924.6.12. 개교국9-20-18 경성 제국 대학으로 계승되었다. / 경성제국대학(1924.6.12.)법9-17-19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 경성제국대학(1924.6.12.)법9-12-05
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 1920년대지9-12-19 •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20년대 후반법9-13-21 • 독립 운동 단체 간에 새로운 통합의 기운이 일어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만들어졌다. / 참의부(1924.6.26. 만주), 정의부(1924.11. 만주), 신민부(1925.3.10.~1929.3.)지9-14-2-17
•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였다. / 『조선사연구초』 동아일보에 연재(1924.10.13.~1925.3.16. 신채호)국9-17-19 • 이 싸움은 낭가 및 불교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다. 또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다. (가)은/는 전자의 대표요, (나)은/는 후자의 대표였다. 이 싸움에서 (가)이/가 패하고 (나)이/가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유교에 정복되고 말았다. / 조선사연구초(신채호, 1924~1925 동아일보 연재) (가)서경파(묘청) (나)개경파(김부식)법9-20-12 / (가)는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 (가)서경파법9-20-12
대종교 계통 인사들이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 1925.3.10. 만주국9-16-12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 1925.3.10. 만주지9-16-19
박은식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25.3.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국9-21-17
• 제1조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그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
제2조 전조의 제1항의 목적으로 그 목적한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 / 치안유지법(1925.5.12.) /국9-20-18
사회주의자들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 / 치안유지법(1925.5.12.)법9-14-07 치안 유지법이 제정되었다. / 치안유지법(1925.5.12.)법9-12-05
미쓰야 협정 / 1925.6. 미쓰야 협정:일본과 만주군벌 사이에서 만주지역 한인 단속에 관한 협정, 국9-17-10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기 직전까지 활약하였다. / 미쓰야 협정(1925.6. /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 탄압)국9-19-09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 미쓰야 협정(1925)지9-12-19
•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서 『한글원본』을 만들었다. / 한글원본(1926 조선일보)국9-20-13
정우회 / 1926.4.14. 서울, 공산주의 단체지9-20-04 • 민족협동전선론에 따라 정우회가 조직되었다. / 1926.4.14. 서울, 공산주의 단체지9-16-19
•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 학생 / 님의 침묵(1926.5.)법9-16-18
•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연계한 6‧10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격문을 작성하였다. / 조선학생과학연구회(1925.9.27. 사회주의 운동단체) 6‧10 만세운동(1926.6.10.)지9-13-20 •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조선 공산당 등이 연대하였다. / 6.10 만세운동(1926)법9-22-20 순종의 국장일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고 시민들이 가세하였다. / 6.10 만세운동(1926)법9-21-22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 6.10 만세운동(1926.6.10.)법9-16-21
• ‘정우회 선언’이 발표되었다. / 1926.11.15. 정우회(공산주의 단체)국9-19-04 정우회 선언 / 1926.11.15. 정우회 선언(민족주의 세력과 일시적 공동전선을 꾸리자는 주장)지9-21-17
나석주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 1926.12.28. 의열단지9-14-19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신간회 결성(1927.2.15.) 조선일보국9-20-13 • 1920년대 국내에서는 일본과 타협해 실익을 찾자는 자치 운동이 대두하였다.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경계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연대하고자 하였다. 사회주의 세력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해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1927년 2월에 이 단체를 창립하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 이 단체: 신간회(1927.2.15.) 정우회 선언(1926.11.15.)지9-21-17 • 신간회 / 신간회(1927.2.15.)지9-20-04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
/ 신간회(1927.2.15.) 지9-17-2-12
• 이를 계기로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 신간회 결성(1927.2.15.)지9-12-19 신간회 설립(1927) / 신간회(1927.2.15.)법9-18-08 창립 당시는 소위 민족적 단일한 정치 투쟁 단체로 이 회가 필요했지만 그 후 본회의 통일적 운동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너무나 막연하여 종잡을 수 없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최근 본회의 근본정신인 비타협주의를 무시하고 합법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민족적 개량주의자가 발호해 온 것이 심히 유감된 일이며, 이는 본회의 근본적 모순으로부터 온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같은 불순한 도정을 따라온 회의 존립을 그대로 용인할 수 없으므로 첨예한 계급 단체를 조직하고 본회를 해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신간회(1927~1931) 신간회 해소론법9-16-21
• (가)___ 발기취지(發起趣旨)
인간 사회는 많은 불합리를 산출한 동시에 그 해결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성 문제는 그중의 하나이다. …… 과거의 조선 여성운동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것에는 통일된 조직이 없었고 통일된 지도 정신도 없었고 통일된 항쟁이 없었다. …… 우리는 우선 조선 자매 전체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동아일보』, 1927. 5. 11.- / (가)근우회(1927.5.)지9-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