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발해

발해 8~10세기(고왕, 무왕, 문왕, 선왕)


고왕(재위: 698~719 대조영)
•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였다. / 발해 건국(698) 국9-22-06 • 길림성 돈화 부근 동모산 기슭에서 나라를 세웠다. / 발해 건국(698) 지9-13-09 •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로 바꾸었다. / 713 국9-19-08

무왕(재위: 719~737 대무예)
•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 지9-14-16 • ★당 현종 개원 7년에 대조영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올려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아들 (가)___ 이/가 뒤이어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가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신당서- / (가)대무예(무왕) 국9-22-06 • (가)___은/는 흑수말갈이 당과 통하려고 하자 군사를 동원 하여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또한 일본에 사신 고제덕 등을 보내 “여러 나라를 관장하고 여러 번(蕃)을 거느리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 습속을 지니고 있다.” 라고 하여 강국임을 자부하였다. / (가)무왕 국9-19-08 • 왕이 신하들을 불러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서 당나라와 통하였다. …(중략)…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직을 요청하면서 우리나라에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히 당나라와 공모하여 우리나라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동생 대문예와 외숙 임아상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려고 하였다. / 왕: 무왕 지9-13-09 •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인안(720) 법9-14-15 인안, 대흥 등 연호를 사용하였다. / 인안(720), 대흥(737)법9-12-11
• ★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산둥성)를 공격하였다. / 732 국9-22-06 장문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 732 국9-19-08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 732 지9-22-02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당(唐)의 산둥(山東) 지방을 공격하였다. / 732 지9-14-16 • 북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산동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 등주 공격(732) 지9-13-09 • 발해의 장문휴산둥 반도를 공격하였다. / 732 법9-18-10 • 당나라 수군의 거점인 등주성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군대가 등주성을 기습했기 때문이다. 등주 자사까지 전사했다는 소식에 당 조정은 신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군은 발해를 공격했지만 추위와 폭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 등주 공격(732) 법9-18-19 • 개원 20년 무예가 장수 장문휴를 보내 해적을 이끌고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을 공격하자, 당이 문예를 보내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이어 김사란을 신라로 보내 병사를 일으켜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 「신당서」 - / 등주 공격(732) 법9-14-15
돌궐⋅일본친교를 강화하며 당⋅신라에 맞섰다. / 법9-18-19

문왕(재위: 737~793 대흠무)
대흥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737 지9-20-10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737 국9-19-08 / 대흥, 보력 / 대흥(737), 보력(774) 지9-14-2-06 •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 대흥(737) 법9-18-19 • 인안, 대흥 등 연호를 사용하였다. / 대흥(737) 법9-12-11
• ★수도를 상경성으로 옮겼다. / 중경(742)→상경(755)→동경(785) 국9-22-06 • 수도를 중경→상경→동경으로 옮겼다. / 중경(742)→상경(755)→동경(785) 지9-20-10 •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 중경(742)→상경(755)→동경(785) 지9-14-16 •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 동경으로 옮겨 중흥을 꾀하였다. / 중경(742)→상경(755)→동경(785) 지9-13-09 • 발해 문왕이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수도를 옮겼다. / 동경(785) 법9-18-10 • / ㉠돈화(동모산), ㉡화룡(중경), ㉢연안(상경), ㉣훈춘(동경)국9-21-09 • ㉠돈화 정효공주 무덤을 찾아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복식을 탐구한다. / X ⇒ [㉡화룡] 정효공주 무덤을 찾아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복식을 탐구한다. 국9-21-09 / • ㉡화룡 용두산 고분군을 찾아 벽돌무덤의 특징을 탐구한다. / 국9-21-09 • ㉢연안 오봉루 성문터를 찾아 성의 구조를 당의 장안성과 비교해 본다. / 국9-21-09 • ㉣훈춘 정혜공주 무덤을 찾아 고구려 무덤과의 계승성을 탐구한다. / X ⇒ [㉠돈화] 정혜공주 무덤을 찾아 고구려 무덤과의 계승성을 탐구한다. 국9-21-09 • 당시 국왕을 ‘대왕’이라 표현한 정혜공주의 묘비가 만들어졌다. / 정혜공주(문왕의 둘째 딸) 지9-14-16
• 중앙에 3성 6부를 두고, 정당성을 관장하는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 지9-17-07 • 중앙의 정치 조직으로 3성 6부를 두었다. / 지9-15-12 3성 6부제의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 문왕 법9-18-19
• 감찰 기관으로 중정대가 있었다. / 지9-15-12
• 국립대학인 주자감이 수도에 설치되었다. / 법9-17-12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며 당의 문물을 도입하여 체제를 정비하였다. / 지9-20-10 • 발해는 당과 화친을 맺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였다. / 지9-14-2-06 당과 친선관계를 맺었고, 신라도를 통해 신라와 대립관계를 해소하였다. / 법9-14-15 /
•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천손(하늘의 자손)이라 표현하였다. / 지9-20-10

선왕(재위: 818~830 대인수)
• ‘건흥’ 연호를 사용하고,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 건흥(818) 지9-14-16
•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만큼 전성기를 이루었다. / 국9-22-06 •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 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에서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 지9-14-16 • 전성기를 맞이하여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웠다. / 법9-18-19 • 중국인들이 해동성국이라 부를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법9-14-15
• 지방을 5경 15부 62주로 편성하였다. / 선왕 지9-22-03 • 지방의 행정 조직으로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 선왕 지9-15-12 / 5경 15부 62주의 행정 제도가 완비되었다. / 지9-13-09

대인선(재위: 906~926)
• 부족을 통일한 여진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 X ⇒ 부족을 통일한 [거란]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발해 멸망(926) 법9-14-15

발해 일반
이 나라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면,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쌀 등이 있다. -『신당서』- / 지9-22-03 / 이 나라의 땅은 영주(營州)의 동쪽 2천 리에 있으며, 남으로는 신라와 서로 접한다. 월희말갈에서 동북으로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사방 2천 리, 호는 십여 만, 병사는 수만 명이다. -『구당서』- / 지9-22-03 /
• 발해의 수취 제도는 조세, 공물, 요역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지9-14-2-11 • 발해는 당으로부터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고, 말과 자기 등을 수출하였다. / 지9-14-2-11
• / 발해 석등, 이불병좌상 법9-17-08
•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었다. / 법9-17-08

발해의 대외관계
• 당과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 국9-12-04 • 일본과는 서경 압록부를 통해 여러 차례 사신이 왕래하였다. / X ⇒ 일본과는 [동경 용원부]를 통해 여러 차례 사신이 왕래하였다. 국9-12-04 • 당에 유학생을 보냈는데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러 명 나왔다. / 국9-12-04 • 일본은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고려왕’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 국9-12-04